오 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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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태백은 주나라의 조상인 희(姬) 씨족 출신으로 주 태왕의 장남이었다. 그는 동생 중옹과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형만 땅으로 이동하여 오나라를 건국했다. 태백은 관개 시설을 개발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오씨 성의 시조로 여겨진다. 사마천은 오태백세가를 저술하여 태백을 높이 평가했으며, 공자는 계력에게 지위를 양보한 태백을 칭찬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일본이 오나라 태백의 후예라는 설이 존재하며, 일본 황실과 야마토 민족이 태백의 후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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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나라의 군주 - 합려
합려는 춘추시대 오나라의 군주로, 오자서와 손무를 등용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초나라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키는 등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 후 부상을 입고 사망하며 아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 오나라의 군주 - 부차 (오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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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은 상나라의 왕으로, 주나라 제후 계력을 중용했으나 감금 후 죽여 상나라 국력 약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 기원전 12세기 중국의 군주 - 계력
계력은 고공단보의 아들이자 서주 문왕의 아버지이며, 고공단보의 예견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아 정의로운 정치를 펼쳤으나 상나라 문정에게 억류되어 굶어 죽었다.
오 태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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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태백의 아버지 고공단보는 후계자로 장남 태백, 차남 우중, 막내아들 계력을 두고 있었다. 계력의 아들 창(昌)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일이 많았고, 창은 뛰어난 아이였다. 고공단보는 "우리 가문을 일으키는 자는 손자 창인가"라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알아챈 태백과 우중은 계력에게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스스로 이동했다. 주나라 건국 후, 주나라 신하들이 태백과 우중을 본국으로 모시려 했지만, 변발을 하고 온몸에 문신을 새긴 이민족 풍습을 이유로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절했다.
태백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동생 중옹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백의 사당은 오늘날의 메이춘에 세워졌다. 원래의 목조 건물은 전쟁으로 파괴되었지만 여러 번 재건되었다. 현재의 건축 양식은 대부분 청나라 시대의 것이다. 공자의 논평이 새겨진 돌이 오늘날의 태백 사당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태백은 오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조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상 왕조 정복 이후 주 무왕은 중옹의 증손자인 주장을 찾아 오나라 왕으로 임명했다.[2]
한편, 역사학자 양관은 사기의 기술이 오류이며, 태백과 우중이 처음 건국한 것은 우이고, 오는 그 분가가 아닌가라고 주장했다.[7] 미야기타니 마사미츠도 우의 작위가 공작인 반면, 오의 작위가 자작이라는 점을 들어 비슷한 설을 제시했다.[8]
2. 1. 가계와 왕위 계승
주나라의 조상인 씨족 출신 태백은 주 태왕의 장남이었다. 그는 오 중옹, 계력 두 명의 동생을 두었다.[1] 고공단보는 장남 태백, 차남 우중, 막내 계력을 두었는데, 계력이 태어날 때 여러 가지 상서로운 일이 있었고, 더욱이 계력의 아들 창(문왕)이 뛰어난 아들이었기에 "우리 집을 일으킬 자는 창이 아닐까"라고 말했다.[2] 주 태왕은 막내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고, 이에 태백과 중옹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장쑤성 메이춘에 정착했다.[1]아버지의 뜻을 헤아린 태백과 우중은 계력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형만 땅으로 스스로 떠났다. 나중에 주나라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맞이하러 왔지만, 두 사람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온몸에 자수를 새겨 자신들은 중화로 돌아갈 만한 인물이 아니라며 이를 거절했다.[2]
태백은 구오라고 칭하며 나라를 세웠고, 형만의 사람들은 많이 따랐다. 이 나라는 오라고도 불린다. 태백이 죽었을 때 자식이 없었으므로 동생 우중이 뒤를 이었다.[2] 태백이 자식 없이 사망하자, 동생인 중옹(仲雍)이 뒤를 이었다.[1]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태백은 관개 시설을 개발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오늘날에는 백독하(伯瀆河)라고 불리는 태백독(泰伯瀆)을 팠다.[1]
2. 2. 오나라 건국
태백은 나라를 일으키고 국호를 구오(句吳)라고 정했다.[1] 형만(荊蠻) 지역의 많은 이민족들이 태백을 따랐다.[1] 태백이 자식 없이 사망하자, 동생인 중옹(仲雍)이 뒤를 이었다.[1] 사마천에 따르면, 태백은 오나라의 건국자였다.[1]주나라의 조상인 '''희()''' 씨족 출신인 태백은 주 태왕의 장남이었다.[2] 그는 오 중옹, 계력 두 명의 동생을 두었다.[2] 주 태왕은 막내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고, 이에 태백과 중옹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장쑤성 메이춘에 정착했다.[2] 그곳에서 태백과 그의 추종자들은 오나라를 세웠고, 메이리를 수도로 삼았다.[2] 태백의 증손자 주 무왕은 상 왕조를 무너뜨리고 주 왕조를 시작했다.[2] 그러나 태백이 오나라의 건국자라는 이야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태백은 관개 시설을 개발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오늘날에는 백독하(伯瀆河)라고 불리는 태백독(泰伯瀆)을 팠다.[1] 태백은 죽을 때 후계자가 없어 그의 동생 중옹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1] 태백의 사당은 오늘날의 메이춘에 세워졌다.[1]
무왕은 우중의 증손자 주장을 오에 봉하고, 그의 동생 우중(동명이인)을 북쪽의 우에 봉했다. 이로 인해 태백과 우중은 오와 우 두 나라의 조상이 되었다.[7]
3. 평가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는 세가 중 첫 번째로, 사마천은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과 그 후손인 오나라 군주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공자는 논어 태백편에서 계력에게 지위를 양보한 태백에 대해 "지극히 훌륭하다고 이를 만하다"라고 평가하였다.
4. 한국 및 일본과의 관계
오 태백은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의 시조로,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자신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중국 조위와 서진 시대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왜인들은 자신들이 오(吳)나라 태백(太伯)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3] 여러 학자들은 야마토 민족과 일본 황실이 오나라 지배 씨족, 아마도 태백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4][5]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는 풍습은 오 지방에서 잠수로 물고기를 잡는 민족에게서 나타난다고 하며, 역대 중국 사서에서 왜에 관한 기술에도 같은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4. 1. 일본과의 관계
중국 조위와 서진 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왜인들은 자신들이 오(吳)나라의 태백(太伯)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3] 여러 학자들은 야마토 민족과 일본 황실이 오나라 지배 씨족, 아마도 태백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4][5]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는 풍습은 오 지방의 잠수로 물고기를 잡는 민족에게서 나타난다고 하며, 역대 중국의 사서에서 왜에 관한 기술에도 같은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일본이 태백의 후예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며, 『한원』, 『위략』, 『진서』, 『양서』 등에 "스스로 태백의 후라고 칭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남송의 『통감전편』, 이씨 조선의 『해동제국기』나 『일동장유가』 등에는 더 자세한 기술이 있다. "오나라 태백의 후예설"이 형성된 시기는 『위략』이 성립한 3세기 후반이지만, 오의 멸망은 기원전 473년이므로 시간적 격차가 매우 크다.
일본에서는 중암원월이 일본을 태백의 후예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와 이치조 카네라의 『일본서기찬소』에서는 태백 후예설을 비판하고 있다. 예수회 선교사 주앙 로드리게스의 『일본 교회 사』는 진무 천황이 태백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에도 시대에는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진무 천황론』에서 진무 천황의 태백 후예설을 긍정했다.
무라오 지로는 중국인의 왜곡된 상상이라고 지적하고, 오오모리 시로는 한족의 중화사상의 산물이라고 본다. 치지와 미노루는 3세기 왜인이 대내외적 수요를 위해 자기 민족의 시조를 태백에 결부시켰다고 지적하며, "왜인 자칭설"을 긍정하고 있다.[13]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본조통감』에 일본 시조가 태백의 후예라는 기술을 보고 분개하여 『대일본사』를 편찬하게 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14][15]
『신찬성씨록』에서는 마츠노노 무라지(松野連)는 오나라 왕 부차의 후예라고 한다.
4. 2. 논란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일본이 태백의 후예라고 하는 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원』, 『위략』 일문, 『진서』 동이전[9], 『양서』 동이전[10] 등에는 왜에 대해 "스스로 태백의 후라고 칭한다"라고 되어 있다. 더 자세한 기술은 남송의 『통감전편』, 이씨 조선의 『해동제국기』나 『일동장유가』 등에 있다. "오나라 태백의 후예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위략』이 성립한 3세기 후반이지만, 오의 멸망은 기원전 473년이므로 시간적 격차가 매우 크다.일본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선승 중암원월이 일본을 태백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한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일본은 오나라 태백의 후예라고 한다"라는 주장을 비판했고, 무로마치 시대의 이치조 카네라도 『일본서기찬소』에서 태백 후예설을 비판했다. 예수회 선교사 주앙 로드리게스는 『일본 교회 사』에서 진무 천황은 태백의 동생인 계력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에도 시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은 『진무 천황론』에서 진무 천황의 태백 후예설을 긍정했다.
무라오 지로는 중국인의 "곡필공상"이라고 지적하고[11], 오오모리 시로는 "한족의 중화사상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12] 치지와 미노루는 3세기 왜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현인 태백에 결부시켰다고 지적하며, "왜인 자칭설"을 긍정하고 있다.[13]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하야시 라잔 부자가 편찬한 『본조통감』에 일본의 시조가 태백의 후예라는 기술이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대일본사』를 편찬하게 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14][15]
참조
[1]
웹사이트
Taibo River
http://en.wuxi.gov.c[...]
2012-04-18
[2]
서적
《史记》
[3]
문서
Encounters of the Eastern Barbarians
Wei Chronicles
[4]
서적
Imagining China in Tokugawa Japan: Legends, Classics, and Historical Terms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9-02-26
[5]
서적
Japanese Historians and the National Myths, 1600-1945: The Age of the Gods and Emperor Jinmu
https://books.google[...]
UBC Press
2011-11-01
[6]
문서
史記
[7]
서적
西周史
上海人民出版社
2016
[8]
문서
春秋名臣列伝
宮城谷昌光
[9]
문서
晋書
四夷伝 倭人
[10]
문서
梁書
諸夷伝 倭
[11]
서적
呉太伯説研究
1940
[12]
서적
呉太伯後裔説
1941
[13]
서적
呉太伯苗裔説の再検討--帝紀・旧辞成立の一序説
東京学芸大学
1949-11
[14]
서적
元禄時代
小学館
1975-08-10
[15]
문서
本朝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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